창세기 29장 — Keil & Delitzsch
29:1
하란에 도착하여 라반에게 환영받다. 밤의 환상으로 마음에 힘을 얻은 야곱은 여행을 계속하여 ‘동방 사람들의 땅’으로 갔다. 이 말은 유프라테스강까지 뻗은 아라비아 사막보다는 그 강 건너편에 있는 메소포타미아를 가리킨다고 보아야 한다. 그는 거기서 들판의 우물을 보았다(창 29:2). 그 곁에는 세 떼의 양이 누워 있었는데, 그 지방의 다른 양 떼가 도착한 뒤 함께 물을 먹이려고 기다리는 중이었다. 29:2에서 우물 입구의 돌이 컸다고 한 말에서, 관사 없는 גּדלה는 서술어이다. 이 말은 모든 목자가 힘을 합해야 돌을 굴릴 수 있었는데 야곱만 혼자 굴렸다는 뜻이 아니다(29:10). 목자라면 누구나 굴릴 수 있는 돌은 아니었으며, 하물며 라헬 같은 여목자가 굴리기는 어려웠다는 뜻일 뿐이다. 그래서 목자들이 함께 양 떼에게 물을 먹이기로 약속했을 가능성이 크다. 이 장면은 고대와 저자들 당시의 동방 관습에 철저히 들어맞으므로, 24:11 이하에 묘사된 장면과 비슷하다는 것은 전혀 이상하지 않다(로빈슨, 『팔레스타인』 1권 301, 304쪽; 2권 351, 357, 371쪽 참조). 다만 이 우물은 아브라함의 종이 리브가를 만난 우물과 구조가 매우 달랐다. 그곳에서는 열린 우물에서 곧바로 물을 길어 가축을 위해 마련해 둔 물구유에 부었다. 이는 저자들 당시 동방의 우물 대부분에서도 볼 수 있던 방식이다. 그러나 여기서는 돌로 우물을 막아 두었으며, 물동이나 물구유는 언급되지 않는다. 따라서 땅을 파서 만든 저수조를 큰 돌로 덮거나 막아 두었을 가능성이 크다. 돌을 굴려 치우면 양 떼를 가장자리로 몰아가 물을 마시게 할 수 있는 구조였을 것이다. [주] 로젠뮐러가 묘사한 헤브론 골짜기의 비르 베샤트 저수조나, 로빈슨이 유다 광야에서 발견한 저수조들(『팔레스타인』 2권 165쪽)과 같은 형태이다. 큰 암반을 파내고 넓고 두꺼운 평평한 돌로 덮었으며, 그 가운데 둥근 구멍을 남겨 저수조의 입구로 삼았다. 많은 경우 이 입구는 두세 사람이 굴려야 할 만큼 무거운 돌로 막혀 있었다.
29:5
야곱은 목자들에게 어디에 사느냐고 물었다. 이를 보면 이 우물은 창 24:11의 우물처럼 하란 성읍 바로 곁에 있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들이 하란에서 왔다고 하자 야곱은 나홀의 아들, 곧 후손인 라반에 관해 묻고 안부를 물었다. לו השׁלום은 ‘그가 잘 지냅니까?’라는 뜻이다. 목자들은 ‘잘 지냅니다. 보십시오, 그의 딸 라헬이 지금 양 떼와 함께 옵니다’라고 대답했다. בּאה는 분사이다. 야곱은 아직 날이 ‘크다’, 곧 저녁까지 시간이 많이 남아 양들을 몰아 우리에 넣고 밤을 쉬게 할 때가 아니니, 물을 먹여 다시 풀을 뜯기라고 목자들에게 말했다. 이는 사촌과 단둘이 만나려고 목자들을 우물에서 떠나게 하려 했던 것이 분명하다. 그런데 그 사이 라헬이 다가오자 그는 친족의 정, 어쩌면 첫눈에 생긴 사랑에 사로잡혀 우물의 돌을 굴려 치우고 그녀의 양 떼에게 물을 먹였다. 그런 다음 입맞추고 기쁨에 북받친 눈물과 함께 자신이 그녀의 사촌이자 리브가의 아들이라고 밝혔다. אביה אחי는 ‘그녀의 아버지의 형제’, 곧 아버지의 친척이라는 뜻이다. 다른 목자들이 이 모든 일을 어떻게 생각했는지는 이야기의 목적에 중요하지 않으므로 생략되고, 곧바로 라반이 야곱을 다정히 맞는 일이 서술된다. 야곱은 라반에게 ‘이 모든 일’을 말했다. 이는 로젠뮐러가 말하듯 ‘여행의 이유와 장자권에 관해 자기에게 일어난 일들’이라기보다, 단순히 29:2–12에 언급된 일들이다. 라반은 ‘그렇다, 너는 내 뼈이며 내 살이다’라고 하며 그를 친척으로 인정했다(창 2:23; 삿 9:2 비교). 이 말 자체로 야곱은 그의 집에 머물 곳을 보장받았다.
29:15
야곱의 두 번의 결혼. 한 달이 꽉 찼을 때—직역하면 ‘날들로 이루어진 한 달’이라는 표현이다. 원문은 창 41:4; 민 11:20 등을 참조로 든다—라반은 야곱이 유능하고 쓸모 있는 목자임을 알게 되었다. 그가 말했다. ‘네가 내 친척이라고 해서 아무 대가 없이 나를 섬겨야 하겠느냐? 네 보수를 정해 보아라.’ 라반의 이기심은 여기서 공정함과 친절의 외양을 쓰고 드러난다. 누이의 아들이 자신의 봉사에 대해 감사나 애정을 요구할 여지를 없애려고, 보통 종처럼 보수를 주겠다고 제안한 것이다. [원문의 창 41:4는 이 기간 표현과 직접 관련되지 않아 참조 오류로 보인다.] 야곱은 라반의 두 딸 중 아름다워서 사랑하게 된 작은딸 라헬을 위해 7년 동안 일하겠다고 제안했다. 한 주간의 날 수와 같은 햇수이다. 완전하고 충분한 기간의 봉사에 자신을 묶으려 한 것이다. 맏딸 레아는 눈이 약해서 그만큼 아름답지 않았다. 동방 여성에게는 빛나고 생기 있는 눈이 아름다움의 으뜸으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라반은 동의했다. 낯선 사람보다는 야곱에게 딸을 주는 편이 낫다고 했다. [주] 저자들은 베두인족, 드루즈족과 다른 동방 부족들에게도 이런 선호가 계속된다고 서술하며 부르크하르트, 볼네, 레이어드, 레인을 인용한다. 야곱의 제안은 한편으로 그가 관습적인 혼인 대가나 친족에게 주는 통상적인 예물을 마련할 형편이 못 되었다는 점에서 설명된다. 다른 한편으로 에서와의 관계 때문에 당분간 라반 곁에 머물러야 했다는 사정도 있었다. 라반의 동의를 딸을 남편에게 파는 관습으로 설명할 수는 없다. 당시 아내를 돈으로 사는 일이 일반적인 관습이었다고 입증할 수 없기 때문이다. 오직 나중에 더욱 뚜렷이 드러난 라반의 이기심과 탐욕으로 설명해야 한다. 그러나 야곱에게 7년은 ‘라헬을 사랑했으므로 며칠’처럼 여겨졌다. 코르넬리우스 아 라피데가 지적하듯, 이것은 ‘감정의 차원에서가 아니라 가치 평가의 차원에서’(not affective, but appretiative) 이해해야 한다. 곧 봉사의 대가로 얻을 것과 비교할 때 그렇다는 뜻이다.
29:21
그러나 그 기간이 끝나 야곱이 보수를 요구하고 통상적인 관습에 따라 큰 혼인 잔치가 마련되자, 라반은 라헬 대신 맏딸 레아를 신방에 데려갔다. 야곱은 어둠 속에서 속임수를 알아차리지 못한 채 그녀와 동침했다. 이렇게 에서를 속여 이득을 얻었던 사람이 자신도 속임을 당했고, 죄가 죄를 통해 징벌받았다.
29:25
다음 날 아침 야곱이 라반에게 속인 일을 항의하자, 라반은 그 지방의 관습을 내세웠다. כּן יעשׂה לא, ‘우리 고장에서는 작은딸을 맏딸보다 먼저 주는 식으로 하지 않는다.’ 전혀 가치 없는 핑계였다. 고대 인도와 다른 곳에서처럼 하란에 정말 그런 관습이 있었다면, 미리 야곱에게 알려 주었어야 한다. 그러나 야곱을 달래려고, 라반은 작은딸을 위해 7년 더 일한다면 일주일 뒤에 그녀도 주겠다고 약속했다.
29:27
“그녀의 한 주간을 채워라.” 곧 레아의 혼인 잔치 주간이 지나게 하라는 뜻이다. 혼인 잔치는 대개 일주일 동안 계속되었다(삿 14:12; 원문은 욥 11:19도 참조로 든다. 다만 후자는 혼인 잔치 기간을 언급하지 않는다). 그 주간이 지난 뒤 야곱은 라헬도 맞아들였다. 여드레 동안 두 아내를 얻은 것이다. 라반은 각 딸에게 시중들 여종 한 명씩을 주었다. 따라서 브두엘이 딸에게 준 것보다 적었다(창 24:61). 야곱이 두 아내를 둔 일은 두 자매와 동시에 결혼하는 것을 금지하는 모세 율법(레 18:18)으로 곧바로 판단해서도 안 되며, 칼뱅 등이 하듯 근친상간이라고 규정해서도 안 된다. 당시에는 이 문제에 대한 명시적인 법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하나님의 복이 이 일을 통해 아브라함의 자손을 큰 민족으로 늘리시겠다는 약속을 이루셨다는 이유로 정당화해서도 안 된다. 이 결혼은 라반의 속임수와 오직 겉모습의 아름다움만 바라본 야곱의 사랑, 곧 죄에 기울기 쉬운 연약함에서 비롯되었다. 그 결과도 야곱에게 참으로 고난을 통해 배우는 학교가 되었다. 하나님은 여러 차례의 낮아짐을 통해, 이런 행동이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에 전혀 적합하지 않음을 그에게 보여 주셨다. 그렇게 이 같은 결혼의 경건하지 못함을 정죄하시고, 훗날 율법에서 금지할 길을 준비하셨다.
29:31
레아의 첫 아들들. 야곱의 죄 된 연약함은 결혼 뒤에도 라헬을 레아보다 더 사랑한 데서 드러났다. 하나님의 징계는 사랑받지 못한 아내가 자녀의 복을 받은 반면 라헬은 오랫동안 아이를 낳지 못한 데서 드러났다. 이로써 이스라엘의 시작은 자연의 일이 아니라 은혜의 일이어야 한다는 사실이 다시 분명해졌다. 레아는 짧은 간격으로 네 아들을 낳고 자기 마음 상태를 나타내는 이름을 지었다. (1) 르우벤, ‘보라, 아들이다!’ 그녀는 이 탄생을 여호와께서 은혜로 자신의 고통을 살펴보셨다는 보증으로 여겼다. 이제 남편이 자신을 사랑하리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2) 시므온, ‘들으심’. 여호와께서 그녀가 미움받는 것을 들으셨다, 곧 살펴보셨기 때문이다. (3) 레위, ‘결합’. 적어도 이번에는, 아들 셋을 낳은 뒤에는 남편이 자기와 결합하여 어느 정도 애정을 보이기를 바랐기 때문이다. (4) 유다(יהוּדה, ידה의 호팔 미완료형에서 나온 동사성 이름), ‘찬양’. 단순히 ‘칭찬받는 자’가 아니라 ‘그로 인해 여호와께서 찬양받으시는 자’라는 뜻이다. 넷째 출산 뒤에는 출산이 멈추었다. 원문은 창 29:31을 가리키지만 실제로 출산이 멈추었다는 말은 35절에 있다. 이는 레아가 자신의 좋은 처지 때문에 지나치게 교만해지거나, 언약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신실하심으로 주신 것을 자기 몸의 다산 능력 때문이라고 여기지 않게 하려는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