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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enesis 16

창세기 16장 — John Wesley

16:1

여기에는 아브람이 하갈을 둘째 아내로 맞는 일이 나온다. 그 사정을 이해해 줄 수는 있어도 옳다고 인정할 수는 없다. 처음부터 결혼이 그런 형태였던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 관습이 생겼을 때에도, 세상을 더 빨리 사람으로 채우기 위해 가문을 늘리려는 질서에서 벗어난 욕망에서 비롯된 듯하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 그리스도께서 결혼을 처음 세우신 질서로 돌이키셨고, 한 남자와 한 여자의 결합으로 정하셨기 때문이다.

16:4

아브람이 하갈을 아내로 맞은 뒤 나쁜 결과가 나타났다. 곧바로 많은 문제가 생겼다. 하갈은 임신한 것을 알자 여주인을 업신여겼다. 사래가 아이를 낳지 못한다며 비난하고 모욕했을 수도 있다. 사래는 아브람을 몰아붙이며 매우 부당하게 그에게 책임을 돌렸다. 그가 하갈의 무례를 두둔한다고 의심한 것이다. 아브람의 말을 들으려 하지 않는 사람처럼, 성급히 하나님께 호소했다. “여호와께서 당신과 나 사이를 판단하시기를.” 마치 아브람이 자신의 억울함을 풀어 주기를 거절한 것처럼 말했다. 감정이 왕좌에 앉으면 이성은 문밖으로 쫓겨나, 이성적인 말은 들리지도 나오지도 않는다. 하나님께 판단을 맡기겠다고 가장 앞장서는 사람이 언제나 옳은 것은 아니다. 성급하고 대담하게 상대에게 벌을 빌어 대는 것은 흔히 자기 잘못과 정당하지 못한 주장의 증거다.

16:6

“당신의 여종이 당신 손에 있으니.” 하갈이 자기 아내가 되었어도, 아브람은 사래를 무시하는 행동까지 두둔하지는 않으려 했다. 평화와 사랑을 지키려는 사람은 거친 비난에 부드럽게 대답해야 한다. 특히 부부는 두 사람이 동시에 화를 내지 않도록 힘써야 한다. [영어 배포본의 ‘first answers’는 문맥상 부드러운 대답을 뜻하는 것으로 보고 옮겼다.] “사래가 그를 학대하자.” 가혹하게 부렸다는 뜻이다. “그가 사래 앞에서 도망했다.” 당장의 분노만 피한 것이 아니라 섬기던 자리를 완전히 떠났다.

16:7

성경에서 천사가 나타났다는 기록은 여기가 처음이다. 천사는 도망가는 하갈을 멈추어 세웠다. 하갈은 애굽 쪽에 있는 술로 가는 길에 있었으므로 자기 고향으로 향하던 듯하다. 우리의 고난이 참된 고향, 더 좋은 본향을 생각하게 한다면 좋을 것이다. 그러나 천사가 하갈을 만났을 때, 하갈은 자신이 지켜야 할 자리에서 벗어나 더 멀리 떠나고 있었다는 것이 웨슬리의 해석이다. 양심이나 섭리를 통해 죄의 길에서 멈추게 되는 것은 큰 자비다.

16:8

“사래의 여종 하갈아.” 이 부름은 하갈의 교만을 꺾는 말이었다. 아브람의 아내였어도 사래의 여종이라 불러 자신을 낮추게 한 것이다. 또한 도망을 책망하는 말이기도 했다. 웨슬리는 사래의 여종이 광야를 떠돌 것이 아니라 사래의 장막에 있어야 했다고 설명한다. “네가 어디서 왔느냐?” 아브람의 장막에서 지켜야 했던 의무와 누렸던 복된 특권을 모두 버리고 달아나고 있음을 생각하라는 뜻이다. “어디로 가느냐?” 애굽의 죄 가운데로 스스로 달려가고 있다는 뜻이다. 그 민족에게 돌아가면 그들의 신들에게도 돌아가게 될 것이다. “저는 제 여주인 앞에서 도망하고 있습니다.” 하갈은 여주인에게서 달아난 잘못을 인정하면서도, 여주인의 얼굴, 곧 불쾌함과 분노를 피해 나온 것이라고 해명한다.

16:9

“천사가 말했다. 네 여주인에게 돌아가 그 손 아래 복종하여라.” 웨슬리는 이를 “집으로 돌아가 네 잘못을 인정하고 자신을 낮추며, 앞으로는 더 바르게 행동하기로 결심하라”는 뜻으로 풀이한다.

16:10

“내가 네 자손을 크게 번성하게 하겠다.” 히브리어는 ‘번성하게 하고 또 번성하게 하겠다’는 식의 강조이다. 세대마다 늘어나 계속 이어지게 하겠다는 뜻이다. 웨슬리는 당시 터키인들이 이스마엘의 후손으로 여겨졌으며 큰 민족을 이루고 있다고 덧붙인다. [이는 저자 시대의 계보 이해이다.]

16:11

이스마엘은 ‘하나님께서 들으실 것이다’라는 뜻이다. 그 이유는 주님께서 이미 들으셨기 때문이다. 들으셨으니 앞으로도 들으실 것이다. 환난 속에서 때맞춰 베푸신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한 일은, 비슷한 어려움에 다시 처할 때도 같은 도움을 바라도록 격려해야 한다. 경건한 기도의 부르짖음이 거의 없는 곳에서도, 긍휼의 하나님은 고통의 울부짖음을 들으신다. 눈물도 기도처럼 말한다.

16:12

“그는 들사람이 될 것이다.” 문자적으로는 ‘들나귀 같은 사람’이라는 뜻이다. 웨슬리는 이를 거칠고 대담하여 누구도 두려워하지 않으며, 길들여지지 않고 다루기 어려워 자유롭게 돌아다니고, 섬김이나 제약을 견디지 못하는 모습으로 풀이한다. “그의 손이 모든 사람을 대적할 것이다.” 이것은 그의 죄다. “모든 사람의 손이 그를 대적할 것이다.” 이것은 그가 받을 벌이다. 다투기를 좋아하는 마음을 가진 사람은 대개 소란스러운 삶을 산다. 남을 자극하고 해치는 사람은 같은 방식으로 보복받을 것을 예상해야 한다. “그러나 그는 모든 형제 앞에서 살 것이다.” 이웃 모두에게 위협과 모욕을 받더라도 자리를 지킬 것이며, 자신 때문이라기보다 아브람 덕분에 그들 사이에서 자기 몫을 지켜 낼 것이다. 이에 따라 창세기 25:18은 그가 모든 형제 앞에서 살았듯 그렇게 죽었다고 기록한다고 웨슬리는 읽는다.

16:13

“하갈이 자기에게 말씀하신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다.” 곧 이렇게 그분의 이름을 고백했다. “주님은 나를 보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하갈에게는 이것이 평생 하나님을 알고 기억할 이름이자 기념이 될 것이다. “하나님, 주께서 나를 보십니다.” ‘주께서 내 슬픔과 고난을 보십니다.’ 하갈은 특히 이것을 가리킨다. 어리석은 행동으로 스스로 어려움에 빠졌을 때에도 하나님은 우리를 버리지 않으신다. ‘주께서 내 회개의 진실함을 보십니다. 내가 어떤 일에서든 주님에게서 떠날 때 그것도 보십니다.’ 이 생각은 언제나 죄를 억제하고 의무를 다하도록 우리를 일깨워야 한다. “하나님, 주께서 나를 보십니다.” “나를 보시는 분을 여기서도 내가 뒤따라 바라보았는가?” 하갈은 아마 그분이 떠나실 때까지 누가 자신에게 말하는지 몰랐을 것이다. 떠나는 그분을 바라보며, 두 제자처럼 뒤늦게 깨달았을 수 있다(누가복음 24:31–32). ‘여기서도’란 아브람의 장막과 제단에서만이 아니라 이 광야에서도,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곳, 자신이 지켜야 할 길을 벗어난 곳에서도 그분을 만났다는 뜻이다.

16:14

“그 우물을 브엘라해로이라 불렀다.” ‘살아 계시며 나를 보시는 분의 우물’이라는 뜻이다. 아마 하갈이 붙인 이름이 오래도록 남았을 것이다. 이곳은 영광의 하나님께서 고난당하는 가련한 여인을 특별히 돌보심을 보여 주신 자리였다. 은혜로 하나님과 교제하게 되고 때맞춰 위로를 받은 사람은, 하나님이 자기 영혼을 위해 하신 일을 다른 이들에게도 전해야 한다. 그들도 하나님을 찾고 신뢰할 용기를 얻도록 하기 위해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