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
Genesis 17

창세기 17장 — John Wesley

17:1

“아브람이 99세가 되었을 때.” 이스마엘이 태어난 지 꼬박 13년 뒤였다. 이삭에 대한 약속은 그만큼 미루어졌다. 아마 하갈과 너무 성급하게 결혼한 아브람을 바로잡고, 아브람과 사래가 매우 늙은 뒤에 하나님의 능력을 더욱 크게 드러내시려는 뜻이었을 것이다.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셨다.”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직접적인 임재를 눈으로 알아볼 수 있는 어떤 모습으로 드러내셨다.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다.” 하나님은 ‘여호와’라는 이름보다 이 이름으로 자신을 아브람에게 알리기로 하셨다(출애굽기 6:3). 야곱에게도 이 이름을 사용하셨고(창세기 35:11), 사람들도 이 이름으로 하나님을 불렀다(창세기 28:5; 43:14; 48:3. 28:5는 영어 배포본의 참조를 유지했다). 욥기에서 가장 많이 사용되는 하나님의 이름도 이것이다. 욥기의 대화들에서 적어도 30번 나오지만, 웨슬리의 설명에 따르면 그 대화들에서 ‘여호와’는 한 번만 나온다. 모세 이후에는 ‘여호와’가 더 자주, 이 이름은 훨씬 드물게 사용된다. “나는 엘 샤다이다.” 이 이름은 하나님의 전능하신 능력을 나타낸다. 어떤 이들은 이를 ‘파괴하거나 황폐하게 하다’라는 말에서 유래한, 심판하시는 분의 이름으로 풀이하며, 옛 세상을 멸하신 일에서 이 호칭을 취하셨다고 본다. 또는 ‘충분하게 하시는 분’이라는 뜻에서 은혜를 베푸시는 분의 이름으로 본다. [어원 설명에 쓰인 히브리어는 영어 배포본에서 ‘wrv’, ‘v’, ‘rva’, ‘yr’로 깨져 표시되어 있다. 여기서는 원문이 함께 제시한 뜻을 옮겼다.] 옛 영어 번역은 이 대목을 뜻깊게 “나는 모든 것에 충분한 하나님이다”라고 옮겼다. 우리가 관계를 맺는 하나님은 스스로 충족하신 분이다. 모든 것을 가지시며 아무것도 필요하지 않으시다. 우리가 그분과 언약 관계에 있다면, 우리에게도 그분은 충분하시다. 그분 안에서 모든 것을 얻고 충분함을 누린다. 가장 큰 바람을 채우고, 다른 모든 것의 부족함을 메우며, 죽지 않는 우리 영혼의 행복을 보장하기에 충분하시다. 그러나 언약에는 서로의 응답이 있다.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 곧 올곧고 진실하라는 뜻이다. 하나님 앞에서 걷는 것은 언제나 그분을 앞에 모시고, 생각과 말과 행동 모두를 항상 그분의 눈앞에 있는 사람처럼 하는 것이다. 모든 행동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규범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목적으로 삼아 늘 마음에 두는 것이다. 예배의 모든 의무에서 그분과 친밀히 교제하고, 거룩한 삶 전체를 온전히 그분께 드리는 것이다. 하나님과 올곧게 동행하는 것은 그분의 온전한 충족하심에 참여하는 조건이다. 하나님을 소홀히 하거나 그분 앞에서 위선적으로 행하면 그 관계가 주는 유익을 잃는다. 하나님의 충족하심을 계속 바라보는 것은 그분과 올곧게 동행하는 데 큰 영향을 준다.

17:3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동안 아브람이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렸다.”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광채에 압도되었기 때문일 수 있다. 다니엘과 요한도 그렇게 했다. 또는 그토록 자격 없는 자신에게 주어진 영예를 생각하며 부끄러워했기 때문일 수 있다. 아브람은 자신을 겸손히 보고 하나님을 경외하며, 이 둘을 표현하려고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린다.

17:4

약속이 엄숙하게 선포된다. 위대하신 하나님은 “나로 말하면, 보라, 내 언약이 너와 함께 있다”고 말씀하신다. 바라보고 놀라워하며, 바라보고 확신하라는 뜻이다. “너는 많은 민족의 아버지가 될 것이다.” 여기에는 먼저 이삭과 이스마엘, 그두라의 아들들을 통해 육신의 후손이 매우 많아지리라는 뜻이 담겨 있다. 웨슬리는 실제 역사가 이에 부합했다고 보며, 공통 조상 노아에게서 같은 세대만큼 떨어져 있는 다른 어느 한 사람보다도 아브라함에게서 나온 후손이 과거와 당시 모두 더 많았다고 주장한다. 또한 모든 시대의 모든 신자가 믿는 자들의 아버지인 그의 영적인 후손으로 여겨지리라는 뜻이다. 사도는 이 약속을 그렇게 이해하도록 가르친다(로마서 4:16–17). 아브라함은 어느 민족에 속하든 믿음으로 하나님과 언약을 맺고, 유대인 저자들의 표현처럼 하나님의 위엄 어린 날개 아래 모이는 사람들의 아버지다.

17:5

이를 나타내는 표로 이름이 ‘높은 아버지’라는 뜻의 아브람에서 ‘많은 무리의 아버지’라는 뜻의 아브라함으로 바뀌었다. 이것은 아브라함의 믿음을 굳세게 하려는 것이었다. 자녀가 없던 때에는 자기 이름마저 때때로 슬픔을 주었을 것이다. 아버지도 아닌 사람이 왜 ‘높은 아버지’라 불려야 하는가? 그러나 이제 하나님은 많은 후손을 약속하시고 그 뜻을 담은 이름을 주셨다. 그 이름은 이제 그의 기쁨이었다.

17:7

“내가 내 언약을 세우겠다.” 바뀌거나 취소되지 않도록 세우시겠다는 뜻이다. 아브라함에게만 주신다면 그가 죽을 때 언약도 끝나겠지만, 하나님은 그 뒤의 자손과도 언약을 세우신다. 육신의 후손만 아니라 영적인 후손도 포함된다. 이 언약은 복음의 의미에서 영원하다. 은혜의 언약은 그 계획에서는 영원 전부터 있었고, 그 결과에서는 영원까지 이어진다. 언약의 외적 시행은 그 인과 함께 신자들의 자손에게 전해지고, 내적 시행은 성령을 통해 모든 시대의 그리스도의 자손에게 이루어진다. 이것은 지극히 크고 귀한 약속들의 언약이다. 여기에는 참으로 모든 필요를 채우는 두 약속이 있다. 먼저 하나님께서 그들의 하나님이 되시겠다는 것이다. 언약의 모든 특권과 기쁨과 소망이 이 안에 요약된다. 행복을 위해 이보다 더 바랄 것은 없다. 하나님은 자신이 누구이신지를 자기 백성을 위해 드러내실 것이다. 지혜로 인도하고 조언하시며, 능력으로 보호하고 붙드시고, 선하심으로 공급하고 위로하신다. 신실한 예배자가 섬기는 하나님께 기대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신자는 자기 하나님 안에서 발견하게 될 것이다. 이것만으로도 충분하지만 약속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17:8

“내가 가나안을 네게 영원한 소유로 주겠다.” 하나님은 전에 아브라함과 그 후손에게 이 땅을 약속하셨다(창세기 15:18). 여기서는 영원한 소유로 약속하신다. 이는 하늘나라, 곧 하나님의 백성에게 남아 있는 영원한 안식의 모형이다. 아브라함이 바라본 더 좋은 본향이 바로 이것이다. 그 본향을 주시는 일이야말로 하나님이 그들의 하나님이 되시겠다는 약속의 광대한 뜻에 부합한다. 그러므로 그런 뜻이 없었다면 하나님은 그들의 하나님이라 불리는 것을 부끄러워하셨을 것이다(히브리서 11:16). 육신에 따른 아브라함의 후손에게 가나안 땅이 보장되었듯, 그의 모든 영적인 후손에게는 참으로 영원한 소유인 하늘나라가 보장된다. 이 영생은 언약의 외적 시행 아래 있는 모든 사람에게 말씀으로 제시되고 성례로 확증되며, 그 보증은 모든 신자에게 주어진다.

17:10

언약의 표는 할례다. 이 때문에 언약 자체를 ‘할례의 언약’이라고도 부른다(사도행전 7:8). 여기서는 아브라함과 자손이 지켜야 할 언약이라고 말한다. 언약에 응답하는 쪽이 간직하는 증서와 같으며, 로마서 4:11에서는 표와 인이라 불린다. 첫째, 할례는 언약에서 하나님이 맡으신 약속들을 아브라함과 그 후손에게 확증했다. 정해진 때에 가나안이 그들의 것이 되리라는 보증이었다. 가나안을 차지한 후에도 이 규례가 계속된 것은 그 약속이 더 멀리, 또 다른 가나안을 내다보았음을 암시한다. 둘째, 아브라함과 그 후손에게 언약에서 자기들이 맡은 의무를 지우는 표였다. 할례가 우선 나타내는 언약의 수락과 육신의 부패를 버리는 일뿐 아니라, 일반적으로 하나님의 모든 명령을 지킬 의무였다. 하나님을 자기 하나님으로 모시려는 사람은 그분의 백성이 되기를 받아들여야 한다. 1. 할례는 피를 흘리는 규례였다. 율법에 따르면 거의 모든 것이 피로 정결하게 되었기 때문이다(히브리서 9:22; 출애굽기 24:8 참조). 그러나 그리스도의 피가 흘려졌으므로 피를 흘리는 모든 규례는 이제 폐지되었다. 그러므로 할례는 세례에 자리를 내준다. 2. 여자도 언약에 포함되었으나 이 표는 남자에게만 시행되었다. 3. 그리스도께서 아직 우리를 위해 자신을 드리지 않으셨으므로, 하나님은 사람이 자기 몸의 일부를 바쳐 언약에 들어가게 하셨다. 웨슬리는 몸에서 떼어 내어도 되는 부분으로 그보다 더 적절한 곳은 없었다고 설명한다. 4. 생후 8일에 시행하도록 한 것은 아기가 고통을 견딜 만큼 어느 정도 힘을 얻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5. 이방인의 자녀들도 할례를 받아야 했다. 이는 때가 되면 믿음으로 아브라함의 가정에 들어올 이방인들을 은혜롭게 내다보는 표였다. 여기에는 사래를 통해 아들을 주시겠다는 약속도 나온다. 아브라함이 많은 민족의 아버지가 되리라는 약속은 그 아들을 통해 성취될 것이다. 사래도 여러 민족의 어머니가 되고 민족들의 왕들이 그에게서 나올 것이기 때문이다(창세기 17:16). 하나님은 백성을 향한 선한 뜻을 점차 드러내신다. 아브라함에게 아들이 생길 것이라고 오래전에 말씀하셨지만, 사래를 통해 낳을 것이라고 하신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주님의 복은 열매를 맺게 하고, 하갈의 경우처럼 슬픔을 더하지 않는다. “내가 그에게 복을 주겠다.” 곧 자녀를 낳는 복을 주시면 아브라함이 그에게서 아들을 얻게 된다. 사회의 통치와 질서는 교회에 큰 복이다. 사래에게서 단지 백성만이 아니라 백성의 왕들이 나올 것이라 약속하셨다. 우두머리 없는 무질서한 무리가 아니라, 잘 조직되고 잘 다스려지는 공동체가 될 것이다.

17:15

“그의 이름을 사라라 하라.” 아브라함의 이름에 더해진 것과 같은 글자가 사래의 이름에도 더해진다. 사래는 ‘나의 공주’라는 뜻으로, 그 존귀함이 한 가정에만 한정된 듯한 이름이다. 사라는 ‘공주’, 곧 많은 무리의 공주라는 뜻이다.

17:17

“아브라함이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려 웃었다.” 불신의 웃음이 아니라 기쁨의 웃음이었다. 바로 이때 아브라함은 그리스도의 날을 볼 것을 기뻐했고, 그날을 보고 즐거워했다(요한복음 8:56). 가나안의 약속에서 하늘나라를 보았듯, 이삭의 약속에서 그리스도를 보았기 때문이다. “백 살 된 사람이 아들을 낳을 수 있을까?” 이것은 의심의 말이 아니었다. 그가 약속 앞에서 흔들리지 않았음을 우리는 알기 때문이다(로마서 4:20). 오히려 놀라운 일, 전능하신 하나님의 능력만이 이루실 수 있는 일이라는 경탄이었다.

17:18

“아브라함이 말했다. 이스마엘이나 하나님 앞에서 살게 해 주십시오!” 사라에게서 태어날 아들보다 이스마엘을 더 앞세워 달라는 뜻이 아니다. 이스마엘이 하나님께 버림받을까 두려워 그를 위해 간구한 것이다. 자녀를 위해 하나님께 구해야 할 가장 중요한 것은 그들이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일이다. 곧 하나님과의 언약 안에 머물고, 올곧게 그분 앞에서 걸을 은혜를 얻는 것이다. 이 기도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은 평안의 응답이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얼굴을 헛되이 구했다고 말할 수 없었다.

17:20

“이스마엘에 관해서도 내가 네 말을 들었다. 내가 그에게 복을 주었다.” 그를 위해 많은 복을 준비해 두었다는 뜻이다. “내가 그를 크게 번성하게 하겠다.” 후손이 많아질 것이다. “그가 열두 지도자를 낳을 것이다.” 후손들이 유력한 집단이 될 것이다. 눈에 보이는 교회가 그의 혈통에서 이어지지는 않았지만, 그에게 영적인 복도 주어졌으리라고 선의로 소망할 수 있다.

17:21

하나님은 그 아이의 이름을 ‘웃음’이라는 뜻의 이삭으로 정하신다. 아들을 주시겠다는 약속을 들었을 때 아브라함의 영이 기뻐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