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18장 — John Wesley
18:1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신 이번 장면은 지금까지 읽은 장면들보다 더 격의 없고 친밀하며, 장엄함과 위엄은 덜 두드러지는 듯하다. 그래서 때가 차면 하나님의 아들이 세상을 찾아오실 그 위대한 방문을 더 닮았다. “한낮의 더위에 장막 입구에 앉아 있었다.” 단순히 쉬려는 것이라기보다, 나그네를 대접하여 선을 행할 기회를 찾으려는 것이었다.
18:2
“보니 세 사람이 있었다.” 이들은 하늘에 속한 세 영적 존재였다. 아브라함이 보고 대화할 수 있도록 사람의 모습을 취한 것이다. 어떤 이들은 셋 모두 피조물인 천사라고 생각하고, 다른 이들은 그중 하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생각한다. “몸을 땅으로 굽혔다.” 신앙은 예의를 없애지 않고 오히려 더 나아지게 하며, 모든 사람을 존중하도록 가르친다.
18:9
“네 아내 사라는 어디 있느냐?” 그들은 사라의 이름을 부름으로, 낯선 사람처럼 보이지만 아브라함과 그의 가족을 잘 알고 있음을 알려 주었다. 자신들을 공손하게 대하는 사람의 아내에 대해 물으며 그 가족에게 따뜻한 관심을 보였다. 또 사라가 그 말을 엿듣게 함으로써, 이어서 할 말에도 귀를 기울이도록 이끌었다.
18:10
“내가 반드시 네게 돌아오겠다.” 다시 찾아오겠다는 뜻이다. 하나님은 자신을 기쁘게 맞이하는 사람들에게 다시 오신다.
18:12
“사라가 속으로 웃었다.” 아브라함의 웃음처럼 믿음에서 나온 웃음이 아니라(창세기 17:17), 의심과 불신의 웃음이었다. 사라가 넘어서지 못한 가장 큰 장애물은 자신의 나이였다. ‘나는 늙었고, 자연적인 이치로는 아이를 낳을 때가 지났다. 지금까지도 아이를 낳지 못했는데, 내 주인도 늙었으니 더욱 어렵다’는 생각이었다. 여기서 사라가 아브라함을 ‘주인’이라고 부르는 점에 주목하라. 웨슬리는 성령께서 이를 사라의 칭찬할 점으로 기록하시고, 그리스도인 아내들이 본받도록 권하신다고 설명한다(베드로전서 3:6). 사라는 존중과 복종의 표시로 아브라함을 주인이라 부르며 따랐다.
18:17
“내가 하려는 일을 아브라함에게 숨기겠느냐?” 하나님은 자신의 계획을 말씀하시면서, 사람이 숙고할 때 사용하는 방식으로 자신을 표현하신다. 여호와의 은밀한 뜻은 그분을 경외하는 사람들과 함께한다. 믿음으로 하나님과 교제하며 사는 사람은 다른 이들보다 하나님의 뜻을 더 많이 알게 마련이다. 현재의 일을 더 깊이 이해하고, 앞으로 올 일도 더 잘 내다본다.
18:19
“나는 아브라함이 자기 자녀와 뒤에 남을 집안사람들에게 명령할 줄 안다.” 이것은 아브라함의 인격에서 빛나는 부분이다. 그는 가족과 함께 기도할 뿐 아니라, 지식을 갖춘 사람으로서 그들을 가르쳤다. 나아가 권한을 가진 사람으로서 명령했다. 자기 집에서 제사장일 뿐 아니라 예언자이자 왕의 역할도 한 것이다. 그는 자녀들만이 아니라 집안 전체를 돌보았다. 종들도 신앙의 가르침을 받았다. 웨슬리는 가정을 이끄는 사람이라면 한 지붕 아래 있는 모든 사람을 가르치고 그들의 행실을 살펴야 한다고 권한다. 하나님이 소돔에 관한 계획을 아브라함에게 알려 주신 이유도 여기에 제시된다. 그는 자신이 아는 것을 나누고, 맡겨진 사람들의 유익을 위해 그 지식을 활용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18:21
“내가 이제 내려가서 보겠다.” 하나님이 무엇인가를 확실히 모르신다는 뜻이 아니다. 사람의 방식에 맞추어 자신을 이렇게 표현하신 것이다.
18:23
“아브라함이 가까이 나아갔다.” 이 표현에는 거룩한 관심과 염려, 그리고 거룩한 담대함이 담겨 있다. 그는 믿음의 확신을 가지고, 군주처럼 가까이 나아갔다(욥기 31:37).
18:27
“저는 티끌과 재에 불과하지만 감히 주님께 말씀드립니다.” 그는 자신의 담대함과, 하나님이 은혜롭게 허락하신 자유에 스스로 놀라는 사람처럼 말한다.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생각하면 그분은 주님이시고, 자신의 보잘것없음을 생각하면 자신은 티끌과 재일 뿐이다.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갈 때마다, 우리와 그분 사이의 한없이 큰 차이를 경건하게 인정하는 것이 마땅하다. 그분은 영광의 주님이시며, 우리는 땅의 벌레와 같은 존재다.
18:30
“주님, 노하지 마십시오.” 믿는 이들이 하나님께 거듭 간청하는 모습을 생각해 보라. 상대가 우리와 같은 사람이었다면, 그가 화를 내지 않을까 걱정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상대하는 분은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이시다. 그분은 우리가 씨름하듯 매달리는 것을 기뻐하신다. 그렇다면 아브라함은 의인 열 명만 있어도 그곳을 살려 주시겠다는 약속을 얻은 뒤 왜 더 구하지 않았을까? 하나는 그만한 의인도 없다면 멸망받아 마땅하다고 인정했기 때문일 수 있다. 포도원지기가 열매 없는 나무를 한 해 더 돌본 뒤에도 열매가 없으면 베어 버리는 데 동의한 것과 같다(누가복음 13:9). 또 하나는 하나님이 그의 마음을 제어하여 더 구하지 못하게 하셨기 때문일 수 있다. 하나님은 어떤 곳의 멸망을 정하시면 그곳을 위해 기도하지 못하게 하신다(예레미야 7:16).
18:33
“아브라함이 자기 처소로 돌아갔다.” 결과가 어떻게 될지 기다리기 위해서였다. 뒤에 드러난 것처럼 그의 기도는 응답되었다. 그러나 소돔에는 의인 열 명이 없었으므로 그 성 자체는 멸망을 피하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