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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enesis 29

창세기 29장 — John Wesley

29:2

하나님의 섭리는 야곱을 외삼촌의 양 떼가 물을 먹는 바로 그 들판으로 이끌었고, 거기서 장차 아내가 될 라헬을 만나게 했다. 여행이나 다른 일이 편안하고 성공적으로 이루어지도록 함께 작용하는 작은 사정들 속에서도 하나님의 섭리를 인정해야 한다. 길을 몰라 난처할 때 때맞춰 길을 알려 줄 사람을 만나거나, 사고를 당했을 때 가까이에 도와줄 사람이 있다면, 우연이었다고 말하지 말고 섭리였다고 해야 한다. 걸음마다 끊임없이 하나님을 인정한다면 우리의 길은 즐거운 길이 된다. 우물 입구의 돌은 물이 귀했으므로 그 물에 대한 소유권을 지키기 위한 것이었거나, 햇볕의 열기로부터 우물을 보호하기 위한 것이었거나, 어린양들이 빠져 죽지 않게 하려는 것이었다.

29:9

“그녀가 아버지의 양을 돌보고 있었다.” 라헬은 양들을 관리했고, 실제로 양을 돌보는 종들이 그 아래에 있었다. 야곱이 이 여자가 자신의 친척이라는 것을 알았을 때—아마 그 이름은 전에 들었을 것이다—이 땅에 온 목적을 생각하며 곧바로 ‘이 사람이 내 아내가 되겠구나’ 하고 생각했으리라고 짐작할 수 있다. 정직하고 아름다운 얼굴에 이미 마음을 빼앗긴 사람처럼, 그는 놀라울 만큼 적극적으로 나서서 그녀를 도왔다(10절). 얼굴은 햇볕에 그을렸을 것이고 차림도 수수한 여목자의 옷이었겠지만 말이다. 그는 기쁨의 눈물과 사랑의 입맞춤으로 그녀에게 인사했다(11절). 라헬은 서둘러 달려가 아버지에게 알렸다. 아버지가 알고 허락하지 않은 채 친척의 다가옴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던 것이다(12절). 첫 만남에서 서로 보인 이런 존중은 행복한 부부가 될 좋은 징조였다. 섭리는 우연하고 뜻밖인 듯 보이는 일을 통해, 야곱이 목적지에 도착하자마자 그의 마음을 신속히 만족시켰다. 비슷한 임무로 왔던 아브라함의 종도 같은 격려를 받았다. 이렇게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눈여겨보며 인도하신다(시 32:8). 일부 유대 저술가들은 야곱이 라헬에게 입맞추며 운 까닭이, 길에서 에서의 장남 엘리바스가 아버지의 명령으로 그를 덮쳐 어머니가 떠날 때 주었던 돈과 보석을 모두 빼앗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것은 근거 없는 생각이다. 그의 눈물을 자아낸 것은 분명 라헬을 향한 애정과 이 행복한 만남이 주는 놀라움이었다. 라반은 성품이 가장 좋은 사람은 아니었지만 야곱을 환영했고, 자신이 누구이며 왜 이렇게 궁핍한 처지로 왔는지에 대한 그의 설명을 받아들였다. 우리는 어리석게 무엇이든 믿는 극단을 피하면서도, 사랑 없이 경계하고 의심하는 반대 극단에 빠지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라반은 ‘너는 내 뼈이며 내 살이다’라고 하며 그를 친척으로 인정했다(14절). 친척에게 불친절하고 자기 혈육을 외면하는 사람들은 참으로 마음이 완고한 사람들이다(사 58:7).

29:15

“네가 내 형제라고 해서.” 곧 친척이라는 뜻이다. “아무 보수 없이 나를 섬기겠느냐?” 그래서는 안 된다. 그럴 이유가 무엇인가? 야곱이 공손하여 대가를 요구하지 않고 일해 주더라도, 라반은 그의 궁핍이나 선한 성품을 이용할 만큼 불공정하게 행동하지는 않겠다는 것이다. 웨슬리는 연대를 계산하면 야곱이 아내를 얻으려고 일을 약속했을 때 나이가 일흔이었다고 말한다. 라헬은 야곱이 처음 왔을 때 아직 어려 혼인할 나이에 거의 이르지 못했을 수 있다. 그래서 야곱은 7년이 찰 때까지 그녀를 기다리는 일을 더 기꺼이 받아들였을 것이다. [나이는 원문대로 옮겼다. 아래 27절 주석의 ‘84세’와는 계산상 차이가 있다.]

29:20

“그녀를 사랑했으므로 그 세월이 며칠처럼 여겨졌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리스도의 나타나심을 갈망하는 사람들에게는 평생의 수고도 며칠처럼 여겨질 것이다.

29:25

“보니 레아였다.” 야곱은 에서인 척하며 자기 아버지를 속였고, 이제는 장인이 그를 속였다. 라반의 행동이 아무리 불의했더라도, 이 일에서 주님은 의로우셨다.

29:26

“우리 고장에서는 그렇게 하지 않는다.” 그 고장에 그런 관습이 실제로 있었는지 의심할 만한 이유가 있다. 설령 있었다 하더라도, 라반이 그 관습을 지키려 했다면 작은딸을 얻기 위해 일하겠다고 야곱이 약속할 때 그에게 말했어야 했다. [인용 첫 구절의 영어 배포본에는 부정어가 빠져 있으나, 이어지는 설명과 성경 문맥에 따라 옮겼다.]

29:27

“이 딸도 네게 주겠다.” 이렇게 라반은 야곱을 여러 아내를 두는 죄와 올무와 불안 속으로 끌어들였다. 야곱은 이런 일을 계획하지 않았다. 아버지가 리브가에게 그랬듯 라헬에게만 충실하려 했다. 84세까지 아내 없이 살았던 사람이니 한 아내로도 충분히 만족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라반은 지참금 없이 두 딸을 시집보내고 야곱에게 7년을 더 일시키려고 이렇게 그를 속였다. 그는 야곱을 궁지에 몰아 두 사람 모두와 결혼할 만한 겉보기의 이유를 갖게 했다.

29:31

“주님께서 레아가 미움받는 것을 보시고.” 라헬보다 덜 사랑받았다는 뜻이다. 그리스도와 비교하여 아버지와 어머니를 미워하라는 말씀도 이런 의미이다(눅 14:26). 그러자 주님은 레아에게 자녀를 주셨다. 이것은 똑같이 아내인 두 사람을 너무 크게 차별한 야곱을 꾸짖는 일이었고, 어쩌면 사랑받는다는 이유로 언니를 업신여겼을 라헬을 제지하는 일이었다. 또한 레아가 자신에게 쏟아진 멸시 때문에 무너지지 않도록 위로하는 일이었다.

29:32

레아는 남편의 사랑을 몹시 갈망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녀는 사랑받지 못하는 것을 자신의 고통으로 여겼다. 남편의 잘못이라며 나무라거나 비난하기보다 마음속 슬픔으로 받아들였다. 웨슬리는 그녀가 아내가 되기 위해 사용된 속임수에 동의했으므로 이 슬픔을 감수할 이유가 있었다고 본다. 그녀는 ‘이제 남편이 나를 사랑하겠지’라는 즐거운 생각으로 맏아들에게 ‘보라, 아들이다’라는 뜻의 르우벤이라는 이름을 지었다. 셋째 아들은 ‘이제 남편이 내게 결합하겠지’라는 기대로, ‘결합된’이라는 뜻의 레위라 불렀다. ‘주님께서 내가 미움받는다는 말을 들으셨다’는 것은 그 사정을 살펴보셨다는 뜻이며, ‘그래서 내게 이 아들을 주셨다’는 것이다. 넷째는 ‘이제 내가 주님을 찬양하겠다’고 하며 ‘찬양’이라는 뜻의 유다라 불렀다. 육신으로 말하면 바로 그의 계통에서 그리스도가 오셨다. 우리의 기쁨이 되는 것은 무엇이든 감사의 이유가 되어야 한다. 모든 찬양은 그 내용으로서도, 그 찬양을 하나님께 드리게 하는 중보자로서도 그리스도를 중심에 두어야 한다. 그분은 이름이 ‘찬양’인 사람에게서 나셨다. 그분이 우리의 찬양이시기 때문이다. 내 마음속에 그리스도가 이루어지고 있는가? 그렇다면 이제 내가 주님을 찬양하겠다.